미국판 현충일, 베테랑스 데이를 가다 남부의 사람,풍경들

11월 11일, 한국서는 빼빼로 데이지만, 미국서는 '베테랑스 데이'(Veterans day)였습니다.
전쟁에 참전했던 군인들을 기리는 날이라는 점에서 미국판 현충일이라고 할수 있지만, 단순히 그렇게 말하고 끝날수 없는 것은 참전용사를 기리는 행사가 전국적 차원 뿐만 아니라 다양한 지역사회 커뮤니티에서 열리기 때문입니다.
 
이날을 맞이해서 조지아주 애틀랜타 인근의 알파레타에 참전용사 기념공원(Veterans Memorial Park)이 개장했는데, 한인타운에서도 가까운 곳이라 겸사겸사 나들이 가보았습니다.

아니, 이게 웬 타향에서 만나는 고향까마귀? 아니, 태극기?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군인들을 기리는 행사가 열리고 있습니다. 조지아주에서는 한국전쟁에 참전해 모두 740명이 전사했다고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50년전에 우리 동네에서 누가 참전해서 전사했는지 잘 모르는데, 전사자 한명 한명을 철저히 기록해놓는다는 점에서 역시 미국답습니다.


공원 바닥에는 한국전쟁 전사자들의 이름과 소속, 장소, 전사 일시를 적은 벽돌이 깔려 있습니다. 사진에 나온 사람은 한국전 참전용사인 JR 웨이지즈 퇴역 준위(Warrant Officer)입니다. 한국전쟁에서 전사했던 동료의 이름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 죽은 날짜를 보세요. 대부분 1950년 6월부터 12월 사이입니다. 북한 남침을 비롯해서 인천상륙작전, 북진까지, 6개월이란 짧은 시간에 이 많은 사람들이 죽은 겁니다. 그 짧은 기간동안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 한국전쟁이 잊혀진 전쟁(foggoten war)라니 잊어선 안되죠."

올해 81세의 노병임에도 불구하고 웨이지즈씨는 자신이 금강 부근 전투에서 부상당해 퍼플하트(전상장)을 받은 이야기를 생생하게  들려줍니다. 군대 이야기에 신이나는 것은 한국 군바리나 미국 군바리나 똑같은 것 같습니다. 하도 신이나서 이야기하니 옆의 다른 참전용사가 지나가며 농담합니다. "이사람 하는 말 다 믿지 마요. 그중에 절반은 뻥이니까."

한국전쟁 뿐만 아니라, 최근 이라크 전쟁까지 미국이 참전한 모든 전쟁의 전사자들 가운데 이 지역 출신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한국계 미국인 김윤근 해병대 상병(Kun Y KIM)의 이름도 잊지 않고 포함돼 있습니다.

천진난만한 어린이들이 전사자 이름이 새겨진 벽돌 위에서 군인들의 설명을 듣고 있습니다. 어릴때부터 학교나 어른들에게 나라에 대한 충성심을 강요당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 군인들을 존경하고 존중하는 자세를 배우는 것이죠.

한참 구경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말을 겁니다.
"저기 공원에 우리 아버지 이름이 새겨진 벤치가 있는데 기념사진 찍어줄수 있나요?"
"물론이죠. 어느 전쟁에 참전하셨나요?"
"미국 독립전쟁(Revolutionary war)이요."

오 마이 갓! 첨엔 제가 잘못 들은줄 알았습니다. 설마 이사람이 지금 230년전에 벌어진 미국 독립전쟁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가?
무려 1700년대에 싸운 자신의 조상을 21세기의 미국인이 지금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은 한번 나라를 위해 싸운 사람은 수백년이 지나도 기억한다, 이런게 미국식 호국주의라는게 실감나는군요.

독립전쟁의 해인 '1776'이 새겨진 초창기 미국 국기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어주면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200년전 참전 용사를 잊지 않다니 미국사람들도 대단하다고 이야기하니, "아니요, 사람들은 잊게 돼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잊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렇게 기념할 필요가 있는거죠."라고 답합니다. 제가 한국 출신이라고 하니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미국도 독립전쟁은 물론이고, 남북전쟁 당시 같은 나라 사람들끼리 갈라져서 싸웠지요. 하지만 전쟁이 끝나고 나서 대통령은 패배한 남군측 군인을 모두 사면하고, 남북의 결혼을 장려했답니다. 결국 내전에도 불구하고 짧은 기간에 나라가 다시 통합될수 있었죠. 이런 미국의 경험이 한국의 남북통일에도 도움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군 출신들은 모두 한국에 보수적일 거라는 편견을 깨는 말이었지요. 미국인들은 북한을 싫어하는 줄 알았다고 이야기하니 이렇게 답합니다.
"그거야 정치인들 끼리는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서로 싫어할수는 있죠. 하지만 미국인들은 북한 사람들도 모두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답니다. 미국과 북한이 언젠가 좋은 관계가 될수 있을거라 믿습니다."

공원 한켠에는 이라크 및 아프간에 파병된 미군 장병들에게 보내는 위문품을 모금하고 있습니다.

과연 세계최강 군대인 미군 병사들은 위문품으로 뭘 바라고 있을까요.
-일단 단거(any sugar item) 많이많이 보내주세요. 후르츠 펀치, 캔디, 캬라멜, 핫초코, 커피믹스, 설탕, 프림 등등. (역시 군바리에겐 단게 제일 중요하죠.)
-크래커, 쿠키, 육포 등등 과자류, 참지, 비엔나 소세지 연어 등 통조림류.
-재봉도구(한국군으로 치면 보수대?), 배터리, 손전등  립밥, 로션, 벌레퇴치약 등 화장품류.
-공책, 편지지, 연필, 잡지 등등. (군바리에겐 역시 집에 보내는 편지 쓰는게 제일 중요하죠.)
-컴퓨터게임, CD, 포커, 카드게임 등
-무척 더운 지역입니다. 썩거나 상할수 있는 물품은 보내지 마세요. 애들 장난감도 안돼요.
-그리고 부디 우리를 위해 많이 많이 기도해주세요!!


한국군 뿐만 아니라 미군도 단거와 편지쓰기에 목숨을 거는 걸 보니, 세계 어딜 가든 군바리들이 바라는 건 다 비슷한거 같네요. 그렇죠. 군인들에게는 누군가의 기도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공원 곁에는 우리나라 재향군인회격인 아메리칸 리젼의 사무실이 있습니다. 사무실 들어서자마자 미국 국기가 확 들어옵니다. 미국인들은 정말 자기네 나라 국기를 좋아합니다.

우리나라는 재향군인회 하면 노인들만 모인다는 편견이 있지만, 여기는 다릅니다. 사무실 한켠에 바와 스낵, 음식점이 마련돼 있어 누구나 즐길수 있습니다.

여기가 재향군인회 사무실인지, 동네 패밀리레스토랑인지 헷갈릴 지경입니다. 그만큼 참전군인들과 일반인들의 거리가 가까운 것 같습니다.

이건 홍대 클럽인가, 아니면 미국풍 호프집인가? 주말에는 이곳에서 댄스파티가 열린다는 공고가 붙어 있습니다. 참전용사 뿐만 아니라, 그들을 돌봐준 부인 등 가족들까지 같이 기리는 것도 특징입니다. 단순히 군인들만의 행사가 아니라 지역 커뮤니티가 가족 동반으로 참여할수 있고, 수익사업까지 벌일수 있는 일석이조입니다.

밖에 나오면 UH-1H 헬기, M-60 탱크 등 실물 장비등이 전시돼 있습니다. 동네 공원에도 이만한 탱크와 헬기를 갖다놓다니 역시 천조국의 스케일은 다른듯? 총기는 물론 탱크같은 군장비조차 퇴역하면 개인 소유로 만들수 있는 미국다운 모습입니다.
 
"이 헬기는 베트남에서 테트 대공세에 참전해, 부상병의 목숨을 구하는 활약을 벌였습니다. 이 전투의 활약으로 파일럿은 의회 명예훈장을 받았습니다."
전시된 헬기의 참전 전투와 이력은 물론이고, 헬기를 조종했던 파일럿의 이름까지 자세히 적혀 있습니다. 참전용사 뿐만 아니라, 참전 장비(!)까지 연혁과 전과를 기리고 있는 거죠. 퇴역한 탱크만 달랑 갖다놓고 아무런 설명이 없는 한국의 박물관과는 대조됩니다. 한국군 장비들도 실전에 참전한 생생한 역사나 비화를 적어준다면 모델링은 물론이고 일반인들에게도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킬수 있지 않을까요.
여담이지만 이 헬기는 1964년부터 2000년까지 무려 36년동안 현역으로 뛰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언론은 UH-1H 사고만 나면 "한국군은 수십년 묵은 고물을 굴려댄다"고 비판하지만, 미군 역시 헬기를 30년씩 굴려야 하는 사정은 비슷한가 봅니다.

이곳에선 베테랑스 데이를 맞아 한국전 참전 기념비가 제막됐습니다.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했다는 예비역 해군장교 제럴드 린 씨가 참전비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참석자들이 한국전 기념비에 묵념하고 있습니다.
아쉬운 점은 이곳이 한인타운에서 가까운데도 불구하고, 이 지역을 관할하는 애틀랜타 총영사관 등 한국정부 외교관의 모습도 전혀 안보였습니다. 물어보니 외교관들은 이런 행사가 있는줄도 몰랐고, 통보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안갔다고 합니다.
듣자하니 요즘 한국정부가 '한미동맹강화'를 부르짖고 있다고 하는데, 정치적 의미는 제쳐놓고라도 적어도 한국에서 피흘린 사람들을 모른체 하는 것은 제대로 된 외교는 아닌거 같습니다.

공원을 안내하는 장교는 "한국전쟁이 잊혀진 전쟁(foggoten war)라지만 우리는 한국전에서 전사한 조지아 군인 740명을 잊지 않는다"라고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한국외교관들은 이날 한국 전쟁을 잊어버렸나봅니다.

덧글

  • NOSBY 2008/12/18 20:03 # 답글

    잘 보았습니다. 몇백년 전에 일어난 전쟁의 참전자도 기념하는 나라가 있는데

    몇해전에 일어난 전투에서 전사하거나 부상당한 해군장병들에 대한 보상과 정치인들의 인식도 어정쩡한

    이나라가 발전하려면 아직도 멀었나봅니다.

  • 하이아 2009/01/05 06:31 # 답글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기왕이면 한국도 이런 쪽으로 발달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쓴 글입니다. 개별적인 사건 몇개만을 갖고, 한 나라의 발전도를 판단하긴 곤란하겠지요.
  • 가아을 2010/07/28 11:24 # 삭제 답글

    좋은글 감사 드립니다.
    우리도 잊지않는 전쟁이 되도록 후손들을 가르켜야 겠습니다.
    부탁드릴 말씀은 "군바리"라는 말은 군인을 비하하는 말 입니다.
    따라서 용어를 "군인" 또는 "참전자" 등으로 교정해 주시기 바랍니다.
  • 하이아 2010/08/03 08:24 #

    재미있게 읽어주셨다면 감사합니다.
    저 역시 한때는 '군바리'였습니다만, 개인적으로 군바리가 딱히 군을 비하하는 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쨌건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 순례자 2012/05/31 09:02 # 삭제 답글

    좋은 글 감사합니다. 건강하세요!!!
  • 오즈 2013/05/18 04:31 # 삭제 답글

    정석환입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시나 모르겠네요. 못 뵌지도 벌써 6년째라 그립습니다. 전 요즘 아동물 출판사에서 삽화 일을 하고 있구요. 원래 원하던 일은 아니지만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그림을 그리고 있어요 ㅎ
    종원씨한데 힘들때 신세 진게 많아서 언제 한번 크게 쏴야 할텐데 뵐 기회가 좀처럼 안 나네요. 한국에 오시면 언제든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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