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악관의 오바마, CSI의 모피어스 미국 뉴스 이야기

경향신문 | 입력 2008.12.18 20:45 에 게재된 원고의 원문입니다. 모든 표현은 현재가 아닌 당시 기준입니다.

지난 12월11일, 최고 인기미드 'CSI'에 '정권교체'가 벌어졌다. 9년간 CSI를 이끌어온 '길반장' 길 그리섬(윌리엄 피터슨)의 하차가 결정된 것이다.

길반장(윌리엄 피터슨, 오른쪽)과 신임 모반장(로렌스 피쉬번)

그의 뒤를 잇는 주인공은 흑인배우 로렌스 피쉬번. '매트릭스'의 '모피어스'로 스타덤에 오른 그가 '모반장'이 된 것이다. 피쉬번은 앞으로 범죄심리학자 '레이먼드 랭스턴' 역을 맡아 CSI를 새롭게 이끌게 된다.

주연 교체의 표면적 이유는 그리섬 역 배우 윌리엄 피터슨의 개인사정 때문이다. 9년간 한 드라마의 주연을 맡다 보니 이미지가 고정되고, 연극을 통해 새로운 연기에 도전하고 싶다는 것이다.

그러나 '길반장'의 하차와 피쉬번의 등장은 단순한 드라마 주연 교체를 넘어, 요즘 시국과 맞물려 남다른 의미가 부여되고 있다. '워싱턴 포스트'는 "오바마의 짐을 이제 피쉬번이 지게 됐다"고 평했다. 미국 안방극장에 '검은 바람'이 불고 있다는 의미다.

독자 여러분은 그동안 미드에서 흑인이 주연을 맡은 드라마를 본 적이 있는가? 기껏해야 출연진 전원이 흑인이었던 80년대 드라마 '코스비 가족 만세' (The Cosby Show)나 흑인 어린이가 백인 가정에 입양된 '개구쟁이 아놀드'(Diff'erent stroks) 정도가 아닐까. 싶다.
사실 20년 동안 미국 주류 TV드라마에서 흑인이 주연이었던 드라마는 하나도 없었다. 미드의 주연은 언제나 백인 선남선녀일 뿐, 흑인은 기껏해야 '약방의 감초' 조연에 머물렀다. 미국 액션영화에는 웨슬리 스나입스, 덴젤 워싱턴 연기력을 인정받은 흑인 배우들이 즐비하지만, 그들 역시 TV 안방극장 주인공 자리를 맡지는 못했다. 보수적인 TV시청자들에게 흑인 주연배우는 아직 시기상조라는 분위기가 대세다. TV드라마에선 흑인 남자 배역은 기껏해야 경박스럽고 래퍼처럼 말많은 떠버리, 흑인여자는 패스트푸드를 좋아하며 뚱뚱하고 수다스러운 아줌마, 흑인 어린이는 어린이 드라마에서 인종적 평등을 위해 마지못해 끼워주는 몫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죽하면 흑인배우 빌 코스비가 "NBC(미국 방송사)는 '흑인 배우 출연 금지'(No Black Characters)의 약자"라고 한탄했을까.

그러나 오바마 당선으로 흑인의 모든 것을 보는 시각이 달라졌다는 것이 미국 언론의 지적이다. 패션지 '마리끌레르'는 '오바마 부부가 흑인에 대한 이미지를 바꿨다'고 말한다. 운동으로 다져진 탄탄한 체격에 해박한 지성을 갖춘 버락 오바마, 날씬한 몸매에 세련된 패션감각을 지닌 미쉘 오바마는 벌써 패션 아이콘으로 각광받고 있다. 오바마 등장으로 '무식하고 수다스런 흑인'에 대한 편견도 깨끗이 부서졌다는 의미다.

그런 점에서 피쉬번의 CSI 출연은 미드에 있어서도 하나의 사건이다. 오바마 등장에 발맞춰 미국 방송사도 지성적이고 세련되며 정의로운 역할의 주인공 배역에 흑인 배우를 발탁했다는 뜻이다. '워싱턴 포스트'는 "처음부터 흑인을 무작정 드라마 주연으로 발탁하면 방송사도, 시청자도 부담스럽다. 그런 점에서 이미 인기를 끌고 있는 드라마 주연을 흑인으로 교체해 시험해보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 신문은 또 "피쉬번이 성공한다면 앞으로 많은 드라마에 흑인 바람이 불 것"이라고 덧붙였다.

다행히도 피쉬번의 첫 CSI 데뷔는 성공적으로 끝났다. 첫 출연한 12월11일 CSI 에피소드는 2060만명이 시청하며 최고 시청률을 기록한 것이다. 이에 앞서 CNN도 밤 10시 뉴스 프로그램에 흑인 코미디언 'D L 휼리'를 메인 앵커로 처음으로 발탁하는 등 흑인의 TV진출은 점점 가속화되고 있다.

흑인 피쉬번에게 자리를 내준 백인 그리섬의 CSI 마지막 출연은 공교롭게도 내년 1월15일. 오바마 대통령 취임식 불과 5일 전이다. 과연 오바마 대통령의 등장이 '안방극장 흑백 정권교체'까지 이어질지 궁금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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