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덕후가 일본을 구한다...은혜갚기 나선 아니메 팬들 미국 뉴스 이야기

경향신문 | 입력 2011.03.22 16:47 에 게재된 글을 약간 가필한 것입니다.

일본이 미국에 수출한 문화 가운데 가장 히트한 것은 무엇일까요. 필자 생각엔 두 가지입니다. 먼저 스시(Sushi, 생선초밥)죠. 미국 어느 동네를 가도 조그마한 재패니스 레스토랑(일식당)이 한 두 개씩은 꼭 있고, 미국인들이 서툰 젓가락질로 초밥을 먹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또 한 가지는 아니메·망가(Anime, Manga, 일본 애니메이션, 만화)입니다. 미국 어린이 케이블 채널을 틀면 '드래곤볼'이나 '포켓몬' '유희왕'이 영어로 떠드는 '아니메' 프로그램을 쉽게 볼 수 있고, 학교 도서관을 가면 '세일러문'부터 '맛의 달인'까지 다양한 만화가 영어로 번역돼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미국 내 일본 망가와 아니메의 위력을 체감할 수 있는 일을 지켜보게 됐습니다. 그 계기는 바로 이번 일본 도호쿠 대지진, 쓰나미 참사였습니다. 지난 11일 일본 대지진이 일어나자 누구보다 동요한 계층이 바로 일본문화를 즐기는 젊은 계층이었다. 아니메 클럽이나 포탈, '애스크 닷컴'(한국으로 치면 지식인 정도?)에 "일본 애니메이션 제작엔 이상없나요?" "내가 좋아하는 만화가는 무사한가요?"라는 질문이 넘쳐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곧 애틀랜타의 로컬 아니메 클럽에서 메일이 한통 왔습니다. 매달 한번씩 일요일에 열리는 아니메 상영회에 '아니메 팬들의 일본 은혜 갚기'(Anime Fans Give Back to Japan) 캠페인을 벌인다는 겁니다. 
기부하기 좋아하는 미국인다운 행동입니다.  알고보니 아니메 팬들은 즉시 일본 돕기 블로그와 페이스북(www.facebook.com/otakushelpjapan)을 개설했다고 합니다. 인기 일본만화 '원피스'의 그림과 함께 붙은 구호는 '오타쿠가 일본을 구한다'(otakus help japan)였습니다. 

팟캐스트와 인터넷 방송이 이어졌습니다. 흑집사, 에반게리온, 원피스 등 아니메만 전문으로 더빙하는 30여명의 성우들이 72시간 마라톤 인터넷 방송을 이어나갔습니다. 불과 일주일 만에 3만 달러라는 성금이 인터넷으로 모였습니다. 페이스북에는 "나는 어렸을 때부터 아니메를 보며 자랐다. 이제 일본에 은혜를 갚아야 할 때다"라는 댓글이 주루룩 달렸습니다. 
"은혜갚기" "일본을 사랑한다"라고 적힌 지진돕기 티셔츠.

아니메 전문 수입사들도 일본 돕기 성금에 나섰습니다. 원피스를 출시하는 '퍼니메이션'에서 일본 돕기 자선 경매에 성우들의 사인이 들어간 포스터를 내놓았습니다. 4월 22일 열리는 보스턴의 아니메 컨벤션 '아니메 보스턴'도 일본 지진 피해자 돕기 모급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일본 돕기 운동 일주일째, 페이스북에 재미있는 소식이 올라왔습니다. "이봐! 우리가 2ch에 올라왔다구!!"
알고보니 이들 양덕후들의 이야기는 지진 피해지역인 후쿠이현의 '후쿠이 신문'에까지 보도된 것이었습니다. 제목하여 "아니메 파워로 전세계에서 250만엔 모금"

보도에 따르면 '일본에 은혜 갚기' 운동을 처음 벌인 주역은 미국인 그렉 워너(27)라고 합니다. 일본만화를 좋아한 그는 7살 때부터 일본어를 배웠고, 일본 여인과 결혼해 일본에서 5년째 영어를 가르칠 정도로 아니메 팬입니다. 만화 '원피스'를 가장 좋아한다는 그의 한마디는 이러하다. "원피스의 주제는 우정이다. 나는 이 만화에서 배운 우정을 지금 전 세계의 친구들과 함께 일본에 보여주고 싶다." 

여기서 한번 뒤집어 생각해보죠. 만약 우리나라에 지진이 일어난다면 미국 젊은이들이 자발적으로 '은혜를 갚겠다'고 나설까요? 별로 기대는 하지 않으렵니다. 미국인이 악해서라 아니라, 한국의 대중문화가 젊은이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일 겁니다. 마지막으로 믿을 건 '원더걸스'와 '소녀시대' '동방신기' 팬들 밖에 없는 걸까요. (아니, 생각해보니까 전세계의 뽀로로 팬들도 있네요.)

물론 미국은 60년전 한국을 위해 기부금을 모아 보내준 적이 있습니다. 우리 동네에도 한국전쟁이 났을 때, 한국에 옷가지하고 분말 우유를 모아 보내줬다는 이동네 할머니가 생각납니다. 하지만 그때는 한국이 전쟁으로 피폐하고 가난하고 못사는 나라니까 보내준 거였고, 일종의 동정이었죠. 

하지만 지금 양덕후들의 기부는 좀 다릅니다. 은혜갚기(give back, 일본말로 하면 온가에시)죠. 동정하기 때문에 기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일본에게 덕을 본 만큼 갚아주고 싶다는, 지극히 동양스러운 사고방식입니다. 어쩌면 양덕후들에게 이런 사고방식을 심어준 것 자체가 일본 아니메의 진정한 영향력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겉으로는 보이지 않는 만화와 애니메이션이 어느새 미국 내 젊은이들 사이에 '친일파'(물론 좋은 의미에서)를 길러내고 있습니다. 일본이 다시 일어선다면 그것은 기부금이 아니라, 일본에 정서적 친근감을 가진 전세계 사람들의 마음 때문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과연 대중문화를 통해 전세계에 얼마나 많은 친한파를 길러내고 있는지, 한번 되돌아봐야 할때가 아닌가 싶군요.

덧글

  • WHY군 2011/04/19 10:31 # 답글

    문화산업이라는게 참 뿌리가 박히면 엄청난 영향을 주는군요.
  • 하이아 2011/04/20 09:41 #

    말씀하신대로입니다. 일본만화의 위력은 일본밖에 나오면 더 잘 보인답니다.
  • 서찬휘 2011/04/19 10:36 # 답글

    일본이 만화와 애니메이션 쪽 서브컬처라면 한국은 드라마와 영화, 음악과 같은 쪽으로 어필하고 있는 양상인 듯하네요. 위탄 같은 걸 보면 그 영향력이 생각 이상으로 크다는 사실에 놀라기도 하고 그래요. 그렇게 영향을 받는 이들을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 어떻게 더 선순환으로 만들 것인가가 관건이겠지요.

    그나저나 정말 오랜만에 뵙습니다-
  • 하이아 2011/04/20 09:41 #

    간만에 뵙습니다. 요즘 적조했죠? 좋은 소식 기다리고 있답니다.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