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노센스 : 오시이 마모루 눈에 비친 한국. 만화 이야기들

전두환과 도쿄 계엄령

일본 헌법에 '계엄령'이란 없다. 전쟁과 군대의 존재를 부정하는 일본 평화헌법이다. 군대가 비상시 치안을 유지하는 계엄이 규정됐을 리가 만무했다.
1991년 당시 [패트레이버2]를 제작하던 오시이의 고민도 여기서 출발했다. 도쿄에 계엄령이 떨어지고 자위대가 진주하는 '정치 시뮬레이션'을 만들고 싶었던 오시이다. 머릿속 상상의 가짜 계엄령으로 그는 만족할 수 없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진짜 계엄령'이었다.
해답은 간단했다. 계엄령은 물건너 바로 옆나라에서 왔다. 본의아니게 모델이 된 주인공은 바로 한국의 전두환 대통령이었다.

계엄령이 떨어진 적이 없던 일본 도쿄지만, 오시이에 따르면 계엄령에 준하는 상황은 딱 한번 벌어졌다고 한다. 1982년 전두환 대통령의 방일이었다. 당시 도쿄 경시청은 산하 기동대는 물론이고 도쿄 근처 특수기동대와 관할기동대, 하다못해 파출소 근무 경찰관까지 차출해 임시로 제2기동대를 편성했다. 이들은 방일 며칠전부터 가스미가세키 근처의 라면집마저 영업정지시킬 정도로 과잉 경호를 벌여 악명을 떨쳤다. 공전절후의 '계엄 아닌 계엄'에 투입된 총예산은 8억9,200만엔(한화 약 10억원)이었다. 무릇 독재자는 그나라 뿐만 아니라 물건너까지 이웃에까지 민폐를 끼치는 법이다.
이처럼 오시이는 82년 전두환 대통령 방일을 모델로 계엄령에 필요한 자위대 병력을 계산해냈다. 그 병력은 완전무장한 2개 보통과연대(보병연대) 1,800명, 전차 90량, 장갑차 및 정찰차량 120량, 지휘차 및 특수차량 30량으로 산출됐다. [패트레이버2]의 충격적인 '도쿄 계엄령'은 이렇게 재현됐다.
오시이는 여기에 부인할 수 없는 한마디를 덧붙인다.
"계엄은 머나먼 과거에 벌어진 극히 드문 사건이 아니다. 예를 들어 이 나라의 이웃인 동아시아의 여러나라들은 대부분 최근까지 계엄령 하에 있든지, 혹은 상시 계엄체제였다."

한국, 패배한 개가 갈 수 있는 곳

오시이에게 있어 한국의 의미는 당시 다른 일본인과 크게 다르지 않다. '과거 일본의 모습을 간직한 동아시아 어딘가의 한 나라'에 불과하다. 그것은 굳이 한국이 될 필요는 없었고, 대만, 홍콩 등 다른 동아시아 국가와 특별히 구분되지도 않았다.
이는 때로 계엄령이라는 일본 제국주의 시대를 연상시키는 독재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반대로 추억이라는 노스탤지어 로 나타나기도 한다. 전두환을 모델로 삼은 오시이의 도쿄 계엄령이 전자의 예라면, [총몽](1989)의 작가 키시로 유키토가 폐허가 된 서울의 청계천을 '고철마을'의 모델로 삼은 것은 후자의 예라고 할 수 있겠다. 일본의 작가들에게 있어 동아시아는 종종 60~70년대 일본으로 대표되는 노스탤지어의 대상으로 재발견되었다.
그것은 30년전 일본에서 혁명을 꿈꾸었던 무라카미 하루키나 오시이 마모루 등 실패한 혁명가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들이 한창 혁명을 꿈꾸었던 30년전 일본은 이제 없다. 현대화된 21세기 미래도시 도쿄에 패배한 개들이 갈곳은 없다.
길잃은 개는 그래도 본래 자신이 있던 옛 보금자리를 찾게 마련이다. 귀소본능은 개의 오랜 습성중 하나이니까. 보금자리를 찾던 개들은 노스탤지어를 찾아 때론 대만 타이페이의 시장을 찾는가하면, 때론 한국 서울의 뒷골목으로 흘러들어갔다.

오시이의 91년작 실사영화인 [케르베로스]의 어번 타이틀은 길잃은 개의 사진으로 시작된다. 제작진의 이름과 함께 등장하는 것은 대만 타이페이 뒷골목을 헤메는 개, 쓰레기통을 뒤지는 개, 길에서 낮잠자는 개, 새끼들을 데리고 다니는 똥개들이다. 현대화된 도시에 적응하지 못하고 뒤처진 지저분한 존재들. 말끔하게 정비된 오늘날 현대 도시 도쿄에는 있을수 없는 존재다.
한국을 찾은 오시이가 서울과 부산의 거리에서 맨 처음 발견한 것도 바로 길거리의 똥개였다. 2000년 부산 국제영화제 참석차 한국을 방문한 오시이는 부산 뒷골목의 잡종견을 발견하고 남달리 귀여워했다고 한다. 그런가하면 2001년 서울을 찾았을 때는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재래시장의 애완견 상점을 찾았다.
오시이는 93년 도쿄를 떠나 아타미로 이사갔다. "도쿄는 이미 개가 살 수 없는 곳이 되었다"라는 한마디를 남긴채...
패배한 개 오시이는 도쿄를 버리고 동아시아를 선택했다.

용가리와 한류

오시이에게 비친 또다른 한국의 첫인상은 '하청'이다. 오시이가 활약했던 80~90년대는 한국의 애니메이션 하청작업이 한창이던 때이기도 하다. 한국은 저렴한 인건비와 뛰어난 손재주로 일본 애니메이션의 동화와 채색, 촬영 등의 업무를 담당했다. 일본에서도 한국에 하청을 주지 않는 애니메이션 회사나 감독은 드물었다. 하청작업 의뢰에 있어서는 오시이도 물론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한국에 보낸 원화나 동화가 가끔씩 없어지는 일이 있었다""마음에 드는 원화는 책상속에 따로 보관해두지 않으면 안됐다"고 술회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한국에 대한 오시이의 인상은 이정도에 그쳤던 모양이다.

그러나 90년대 말 일본에 불어닥친 한국영화의 붐은 오시이의 생각도 바꾸게 된다. 오시이는 최근 일본에서 개봉된 한국영화에 대해 대체로 후한 평가를 내리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 첫 타자는 엉뚱하게도 심형래 감독의 [용가리](1999)였다.
오시이는 2001년 2월 자신의 영화 [아바론]의 한국 홍보차 내한한 자리에서 [용가리]에 대해 언급했다. 그는 글쓴이에게 "[용가리]에 사용되는 디지털 장비 '도미노'는 [아바론]과 같은 것"이라며 "다만 도미노의 사용법은 용가리와 정반대"라고 강조했다. 당시 [용가리]는 아직 일본 개봉도 되지 않았던 사실을 감안하면 [용가리]에 대한 오시이의 관심이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지만 [용가리]와 [아바론]은 서로 닮은 곳이 많다. 두 작품은 모두 SFX영화이며, 한국영화, 일본영화라는 범주를 뛰어넘은 국제적 영화다. 제작도 일본이나 한국이 아닌 외국 배우와 해외로케로 이뤄졌다. 대사도 자국어가 아닌 영어와 폴란어로 녹음됐다. 두 작품의 감독 역시 순수 영화계 출신이 아닌 애니메이션 감독과 연예인 출신이라는 공통점도 빼놓을 수 없다. 두 작품 모두 2001년 초에 같은 영화사에 의해 국내 개봉됐다는 점도 이채롭다.

그가 최근 "대단하군. 한국영화는"이라며 호평한 한국 영화는 [반칙왕](2001)이다. 오시이의 [반칙왕] 평은 코미디 영화에 대한 정의부터 시작된다. 그는 "불특정 다수를 웃겨야 하는 코미디 영화는 관객이 공유하는 시대 분위기를 잘 그려내지 않으면 안된다"며 전제한 후 "[반칙왕]의 시나리오는 매우 고전적이지만, 프로레슬링의 분위기를 잘 살려낸 코미디 영화"라고 높이 평가한다. 프로레슬링의 열렬 팬인 오시이 본인의 취향이 반영됐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영화속 레슬링 액션에 대해서도 "(김지운) 감독은 코미디 영화야말로 액션을 빼놓아서는 안된다는 철칙을 충실히 지키고 있다"며 호평했다.
그는 또 [반칙왕]을 예로 들며 일본영화계에 일침을 가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오시이는 "일본 사회에는 공유할 수 있는 시대 분위기나 일체감이란 것이 이미 사라졌다""따라서 오늘날 일본영화계에는 코미디 영화가 나올 수 없다"고 혹평하고 있다.

한국의 핵잠수함이 일본을 핵미사일로 공격한다는 내용의 한국영화 [유령]도 오시이의 눈길을 끈다. 다만 그가 주목하는 건 영화속 반일감정이나 역사왜곡 문제가 아니다. 그 이전에 두루뭉실한 잠수함의 고증이 문제다. 그는 "[유령]에 등장하는 러시아제 잠수함이 아쿨라급인지 타이푼급인지 알아보려 했지만 결국 끝까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제대로된 폴리티컬 픽션(군사 영화)을 만들겠다면, 적어도 군사적 고증이나 디테일 정도는 확실히 해 두 지 않으면 안된다"고 지적한다. [패트레이버] [공각기동대]등 정치-군사를 소재로 한 작품을 만들어낸 오시이다운 지적이다.

수많은 '김상'들

그의 최신작 [이노센스]에는 그 어느때보다도 많은 한국의 그림자를 엿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영화 중간에는 자신의 소설 [야수들의 밤]의 한국어 번역본이 살짝 등장해 보는 이를 웃음짓게 만든다. 또한 극중 중요 등장인물 중 하나로 해킹전문가인 '킴(KIM)'은 설정상 한국계로 묘사되고 있다.
극중에서도 바토가 용의자를 취조하는 장면에 재미있는 대사가 나온다.

"김은 어디에 있는지 알고싶은데..."
"그런 이름을 가진 사람은 이 거리에는 얼마든지 있는걸."
"김은 많을지 몰라도 내가 찾는 김은 오로지 하나뿐이야."


프로덕션 IG의 이시카와 미츠히사 사장은 "오시이 감독은 이 장면의 힌트를 한국 여행중에 얻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시카와에 따르면 오시이 감독이 2000년 한국에 처음 왔을때 일본어 통역은 김씨였다. 어느날 오시이가 일이 있어서 "김상"하고 불렀더니 그 자리에 있는 사람 중 절반이 뒤돌아봤다는 것. "한국에는 김이란 성씨가 그렇게 많은줄은 몰랐다""'정체성에 대한 질문'이라는 영화의 주제와 연결되는 것 아닐까"라고 술회했다.

오시이가 그리는 미래 세계는 국경이 없어지고 문화가 뒤섞인 네트워크화이다. "미래가 되면 한국 일본 대만 중국 구분 없이 뒤섞이게 될 것"이며 "그럴수록 정체성에 대한 의문은 심화될 것"이라는 것이 오시이의 전망이다. 오시이가 그리는 미래세계에는 이미 한국도 포함되어 있는 것일까.


이노센스 개봉을 기념해 올려두는 포스팅입니다.
사실은 옛날에 작성해 두었던 글의 재탕입니다만...
그런데 써놓고보니 웬일인지 논조가 저번 마케이누 글과 별반 다를게 없네요?

덧글

  • JOSH 2004/10/17 23:36 # 답글

    이노센스 오늘 또 한번 더 보고 왔군요.
    모처럼 극장서 재미있는 애니 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 건전유성 2004/10/18 00:46 # 답글

    음 뒤엎어진 청계천과 그 작위적이고 몰취미한 복원, 그 불도저식 추진과정(?)을 보면 키시로씨는 무슨 생각을 하려나.
    오시이씨, 다음에 한국엘 오면 모란시장 안쪽의 개시장엘 가보세요, 낄낄.
  • 功名誰復論 2004/10/18 07:27 # 답글

    남의 나라에서 자신들의 옛 모습만 찾는 건 악취미입니다. 이 말은 우리한테도 해당합니다만.
  • 가넷 2004/10/19 01:57 # 답글

    자칭 오시이 마모루의 팬으로서 그와 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기 잘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산왕 2004/10/19 18:59 # 답글

    오시이는 혁명을 동경할 뿐이었지 않습니까...
  • 하이아 2004/10/21 00:38 # 답글

    JOSH 님> 저는 시카프에서 이노센스를 처음 본 이래, 도합 4번을 보았군요. 간판 내려가기 전에 5번은 볼 생각입니다.
    건전유성 님> 안그래도 오감독, 개시장은 아니고 평화시장 애완동물 상점은 다녀온 적 있다더군.
    功名誰復論 님> 지독한 악취미죠. 문제는 누구나 걸리기 쉬운 악취미라서 그렇지.
    가넷 님> 오래간만입니다. 건강하신지요?
    산왕 님> 정확히 말하자면, 혁명을 해보지도 못하고 김빠진 거겠죠.
  • 루리도 2004/10/24 05:13 # 답글

    이 글 이제야 봤습니다. 역시 형의 글솜씨는 대단하다는걸 느꼈다고나 할까요..^^;(부러워...OTL)
    이래저래 재밌고,유익하게 읽었습니다..^^
  • 하이아 2004/10/26 00:50 # 답글

    루리도 군> 재밌었다면 다행이고...너 있는 그쪽 동네는 괜찮은거니. 부디 무사하고 건강하길.
  • 우주괴물 2005/03/10 16:37 # 답글

    좋은글이군요. 링크신고 합니다.
  • 하이아 2005/04/29 00:19 # 답글

    우주괴물 님> 링크 감사합니다.
  • 늅실러 2017/07/04 14:13 # 답글

    엄청 예전 글이고, 2011년에 이 블로그가 정지된 걸로 봐선 아마 주인장께서 읽을 일은 없겠지만... 이 글에서 틀린 점이 있는데 82년의 방일이 아니라 84년의 방일입니다. 이 이야기의 정확한 출처는 찾을 수 없었으나, 패트레이버 2 tokyo war에서 그를 인용했다는 걸 보면 전두환의 방일을 참조한 것은 맞는 듯합니다 ( http://shbttsy74.tumblr.com/post/84724590641/%E8%AD%A6%E5%AF%9F%E3%81%A8%E8%87%AA%E8%A1%9B%E9%9A%8A%E3%81%AE%E9%A3%9F%E7%B3%A7%E4%BA%8B%E6%83%85%E8%AD%A6%E5%82%99%E7%B7%A8 ). 아마 비슷한 시기의 인터뷰나 칼럼인 모양인데, 패트레이버 2 the movie의 작중 시기인 2002년으로부터 20년 전이라는 얘기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신 듯.

    실은 제가 이 글을 학창시절에 뉴타입에서 열심히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세월이 엄청 지났네요.
댓글 입력 영역